Emptyness
허물을 벗고 짐을 내려놓고 내안에 찬 잉여의 기름을 온전히 빼는 날까지 나는 비워낸다.
오늘도 비워냈다. 물건은 물론. 다 읽고 혹여나 나중에 또 읽지 않을까 하며 남겨둔 책들, 읽다 말고남겨두었으나 몇 년째 손도 대지 않은 책들, 나중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모조리미련 없이 비웠다. 책도 나의 외부에 있는 존재다. 따라서 진짜 정답을 줄 수 없다. 항상 고민이 생기거나 정답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스스로 고민하기보다는 책부터 찾아 읽어왔다. 그러나 나의 고민의 열쇠는 항상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부터는 책을 포함해 물건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몇 년 째 쓰고 있는 케이스가 다 낡아 너덜너덜 해졌지만 기능상의 문제는 전혀 없기때문에 그 기능이 다할때까지 새 물건을 사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물건을 구매하거나 또는 버리며 이 물건 하나가 환경과 세계에 어떤 영향이 갈지 자동적으로 떠올라 더이상 내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쌓아두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음식또한 어느 순간부터는 먹을 만큼의 양만을 덜어 먹고, 먹으면서 배가 얼마나 부른지 의식하며천천히 먹으니 내가 먹어야 할 진짜 음식의 양을 알게 되었고 필요한 영양(먹고싶은 것)이 무엇인지 느끼게 되었다. 부모님이 해주신 밥도 감사하며 먹지만 추가로 먹고싶은 것들도 내 스스로 구매하여 손질하고 먹는 연습을 한다. (아보카도ㅎㅎ맛있어..) 글을 쓸때도 꾸미지 않는다. 내가 떠오르는대로. 마음이 가는대로.
기한이 지난 화장품도 다 버렸다. 예전의 나라면 애써 미련을 가지며 몇 번을 더 사용했을테지만 이제는 유통기한 지난 화장품이 내 피부에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른다는 것을 알기때문에 그 어떤 집착도 쉽고 홀가분하게 버릴 수 있었다
오예이~ 멋진 미술작품 하나가 탄생했다. 내가 지금까지 만든 것 중에서 가장 꾸밈없고 솔직한 작품이다. 처음엔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짜내고 뿌리다 보니 작품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들었다. 비워내니 역설적이게도 인공적이고 진한 향기가 퍼진다. 비록 버리려고 이렇게 난장판으로 짜낸 것이지만 내가 모른다라는 것을 알게한 소중한 것이기도 하다.
물건이 비워지고 있는 것을 바라보니 정신도 함께 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버리지 못했던 물건은 내 마음속 집착의 물질적 표상이었던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새로운 물건을 사고나면 언젠가는 낡아서 버리게 되었던 것이 스쳐지나갔다. 내가 갖고싶어 사려 했던 새 아이패드 케이스는 아직기능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낡아보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터넷 쇼핑몰을 탐색하고 돌아다녔었다. 이 것을 의식하지 않았다면 이미 새 물건을 구입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하지만 나에겐 다시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결정하기 전 끝없이 망설이는 우유부단한인간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이 생각하는 것이 소중한 나의 자산이다.
또한 좀더 비워진 공간 속에 내가 존재했을 때 가벼움을 느꼈다는 것은 공간과 정신의 상호작용이아주 깊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산에 운동을 하러 나서면 일단은 자동차들이 내뿜고 있는 탁한 공기를 가로질러 가야 한다. 하지만 산 근처에 들어서는 순간부터는 맑은 느낌이 확 다가온다. 매연가득한 도로와는 강하게 대조되게 나뭇가지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그 시원함. 느끼면 느낄수록 강렬해진다. 달리기를 시작하면 이 느낌은 약해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좋다. 숨을 고를 때에 폐 가득히들어차는 자연의 숨결바람은 너무나 소중하다.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숨쉬는 식물들은때로는 저마다 개성있는 채도의 빛깔을 띄며 계절을 알리고 있다. 어렸을 때 누군가 나에게 산과 바다중에 어느 곳이 더 좋으냐 물으면 매번 바다라고 대답해왔던 것이 떠오른다. 왜냐고 하면 산에는벌레가 있잖아. 하며 귀여운 답을 했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다양한 벌레(생명)가 있다는 것은 그 공간의 환경이 생명체에게 좋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젠 눈에 특히 띄는 벌레를 보면 신기해서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본다. 뭔가 어릴적과 현재의 나의 생각 행동이 사회적 성장 과정과는 반대되는 것 같다..
물질의 실체는 99.99% 비워져 있다던데 그렇다면 이 물질을 이루는 것은 정신이지 않을까 하는가설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직도 스스로 생각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탐구하고 남겨놓은 기록을 보는 데 시간을 더 보내고 있지만 내 스스로 탐구할 힘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즉 독창성을 함양하고 이는 작품 활동에도 크게 영향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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